그 날은 진서가 담당하는 재판이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교수 친구와 점심을 먹으러 대학교로 향했다. 5월이라 더워지기 시작한 햇볕이 그를 찔렀다. 졸업식 시즌에 어울리는 길 같다는 기분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판사 일을 시작하고 여유를 느끼는 건 아마 친구와 수다를 떨거나 밥을 먹는 딱 그 정도다. 항상 똑같았다. 언제나 가방에 들어 있는 법전이 어깨를 누...
초록, 새순과 잎새가 날실처럼 얽히며 늘어나고 기억에도 없는 청춘 소설을 쓰며 모네의 풍경화를 흉내 낸다 햇살, 직사광선을 삼키고 계속할 혁명을 위해 글을 밝히는 전등을 대신한다 블랙리스트와 그림과 카메라를 망치로 때리는 건 오히려 들불에 기름을 붓는 일 습기, 주저앉게 하는 통증 피부에 닿는 물방울에 익숙하지 않은 건 매년 같은 일 푸름, 바다가 아니어도...
불온서적 사이 줄기에 상처 난 네 잎 클로버 마법은 사소한 계기로 꽃피어 야생화 군락지를 만든다 꽃마리와 냉이, 별꽃이 없으면 진달래는 조금 수수해 나침반을 고치는 건 시민 수정 테이프와 볼펜을 들고 법전을 고치는 건 사고 유가족들 조개껍질이 녹지 않는 건 나뭇잎이 무지개를 흡수하는 것과 같은 이유 엊그제 명왕성이 소행성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서적 위로 검은 ...
추모에 재를 뿌리고 불을 지르는 걸 혐오한다 남 일이고 사고사한 게 뭐 어떠냐는 말 친하지 않은 누군가가 알던 애가 죽어도 그리 말할까 배가 가라앉아 고래 형태로 별이 된 이들일까 걱정하던 한국인 동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교복을 입고 지내는 내내 한 번도 친하지 않던 그 애 나를 은근히 따돌리던 열댓 명 중 하나였던 그 애가 형식적인 질문에 돌아온 답은...
화면을 건드리는 건 사소한 이유 보고 싶은 마음에 메시지 대신 전화번호부 그 애는 차원이 다른 곳에 살아서 힘 들려나 꾹 누른 건 망설이다 돌아 나온 앱 몇 개 초시계가 분으로 변하는 작은 칸 위로 LED가 반짝인다 갑자기 우울한 건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네 화면 위로 비치는 얼굴 둘은 차원 속 나와 그 애 사소한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까맣게...
내 이름은 중성적이다 여자든 남자든 안 가리고 쓰기 좋은 이름이지만 흔한 건 몰라 교복 때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좋아 옥돌 같은 명확한 의미가 좋아서 또 다른 이름은 국적 불명 대한민국과 서양권 둘 다 통용된다 국적을 넘나들고 있는 게 괜찮더라 글자를 곱게 다듬고 형세를 정돈하라 고운 건 비단결과 장미꽃에만 해당하지 않으니 물살을 버티고 일어나기 게임...
여울을 노니던 플라나리아 위로 자갈이 굴러떨어져 둘로 갈라지는 걸 보았다 멈추어 있던 것도 잠시 눈과 옆선이 만들어져 다시 이곳저곳 발을 딛는다 나는 아무 표정 없이 눈 끝만 움찔하며 플라나리아가 떠난 물 위로 누웠다 세계를 만들던 팔레트 위 물감이 갈라지고 우주가 만든 지구 위에 풍덩 내가 만든 세계는 옆에 끄적인 시가 이어진 야생화 군락지 하늘은 답지 ...
다사다난한 거리 비행기를 타고 떠나거나 돌아오고 장마 끝 무렵에 벼가 고개를 숙이기 전 길목을 관찰한다 키보드를 두드리다 깨진 손톱을 다듬고 나서 쨍한 햇살에 커튼을 치는 건 망막 보호를 위한 자기방어 혁명은 여름에 일어나지 않는다던데 패랭이꽃이 피는 동안 비와 햇살이 번갈아 가며 싸우기에 그런가 반쯤 늘어진 그늘 아래 길고양이도 지쳐 보여 공원을 오가며 ...
깃발을 들고 함성을 지르려면 목숨을 바쳐라 총칼을 든 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쏘고 베어낼 테니 해가 가고 풍경이 변해도 거리로 나서는 이들은 각오했다 하늘이 팽창하는 속도는 우주와 정비례 별이 나고 지는 숫자만큼 별자리를 재구성하고 모래톱을 건드리는 물비늘은 피가 흘러 담긴 이야기를 다듬는다 푸른 장미를 좋아하는 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기에 그 누가...
딱히 친구를 많이 만들려 애쓰지 않았다 짧은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서 내가 더 다가가면 부담스러울까 적정선이 그어진 지점은 신경세포로도 모르는 위치 피부 위 지문보다 복잡한 미로에 빠졌네 어떤 이들과 같이 있으면 어딘가 인형이 된 기분이기도 하고 같은 반에 있거나 동급생이라 해도 친구는 아닌데 용기를 내 말을 걸어도 마음 한쪽에...
물 위로 세워진 다리를 건너는 걸 좋아한다 궁궐과 거리를 연결해서 두 세계가 만난다면 다리를 흉내 낼지 모른다 악수하는 지점에는 돌 틈에 자란 이끼꽃이 만개하고 이해하기 위해 돌 위로 그림이 그려진다 보스니아 네움 해안선은 23킬로미터다 작은 항구를 지켜내려고 애를 쓰는 건 바다가 옆에 있어서 나아갈 곳을 이어 주는 다리는 이런 게 아닐까 먼 곳으로 나아가...
대부분이 가지 않는 길을 걸을 때는 반쯤 눈을 감으라 이야기한다 찔레와 쐐기풀이 오솔길 위로 얽혀 있어서 어느 길이든 걸으면 다리가 아픈 건 똑같은데 통증이 살갗인지 발바닥인지 구분하는 건 좀 우스워 유리 조각이 박히는 것만 아니면 되는 거 아닌가 다 흙먼지를 한 번 뒤집어쓰는 건 비슷한데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노래는 가사는 비밀의 화원과 기억 조각이 차...
일반인, 특이사항은 글을 쓴다는 것. 가능하면 매일 시 씁니다. 프사는 라무님 커미션. 썸네일 사진 대부분은 언스플래시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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